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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을 다룬 영화는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고전적인 ‘백 투 더 퓨처’부터 감성적인 ‘어바웃 타임’, 철학적인 ‘프라이머’까지 시간이라는 소재는 SF 장르의 핵심 요소이자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영역이다. 그 중심에 2020년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TENET)』이 있다. 단순한 시간 이동이 아니라, ‘시간 역행’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테넷은 기존의 시간여행 영화와는 전혀 다른 체계와 구조를 통해 관객에게 새로운 체험을 제공했다. 이 글에서는 ‘시간여행 영화’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테넷의 독창성과 현재적 가치에 대해 살펴본다.
과학영화로서 테넷의 시도
테넷은 기존 시간여행 영화들이 따랐던 '시간선상 이동'의 방식을 철저히 탈피한다. 이 영화는 시간 자체를 ‘물리적 방향성’으로 바라보며, '엔트로피 역전(Inverted Entropy)'이라는 실제 물리학 개념을 활용해 ‘시간 역행’을 구현한다. 이는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 반대로 진행되는 상태에 놓인 인물이 현재를 거꾸로 살아가는 독특한 구성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설정은 기존의 SF 영화가 비약적으로 도약한 지점이다. 단순히 '미래에서 과거로 이동하는 장치'를 등장시키는 수준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물리 현상'을 철저하게 설정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플롯을 설계한다. 엔트로피 역전이란 개념은 이론 물리학에서 실재하는 개념으로, 자연 상태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이론상 존재 가능하다는 점에서 영화적 상상력과 과학이 절묘하게 결합된 사례다. 또한, 테넷은 과학을 단순히 배경설정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전반의 사건 전개와 미장센, 대사 구성에도 이를 반영한다. 총알이 되돌아가는 장면, 숨을 쉬기 위해 산소마스크를 써야 하는 환경, 일반인과 ‘역행자’가 섞여 있는 전투 장면 등은 모두 이론적 토대 위에 구축된 장면들이다. 이러한 정교함은 관객에게 마치 하나의 실험 시뮬레이션을 보는 듯한 몰입감을 제공하며, 테넷을 단순한 SF를 넘은 ‘과학영화’로 끌어올린다.
SF 장르의 트렌드와 테넷의 독창성
21세기 들어 SF 장르는 단순한 우주전쟁이나 외계인의 침공이 아니라, 점점 더 철학적이고 구조적인 이야기로 발전하고 있다. 놀란의 이전 작품인 ‘인터스텔라’가 중력과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다루며 과학적 사실에 기반을 두었듯, ‘테넷’ 역시 SF 장르가 ‘보다 지적인 서사 구조’를 향해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테넷의 독창성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영화적 시간 개념의 재설계. 과거-현재-미래가 아닌, 동시성과 반대 방향의 시간 구조를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플롯 구성을 시도했다. 둘째, 주인공의 심리보다는 시스템 그 자체에 중심을 둔 서사. 이는 ‘캐릭터 중심’의 기존 할리우드 서사 구조에서 벗어나 ‘구조 중심’의 영화로서 신선한 접근이었다. 셋째, 액션과 시공간의 완전한 결합. 기존 액션영화가 단지 총격과 추격을 보여주는 데 그쳤다면, 테넷은 ‘시간의 방향’이라는 개념을 액션 장면 자체에 녹여냄으로써 보는 이를 혼란에 빠뜨리면서도 새로운 감각을 선사한다. 이러한 독창성은 호불호를 갈랐지만, 동시에 기존 SF 영화에 피로감을 느낀 관객들에게는 새로운 장르적 자극이 되었다. 테넷은 ‘시간을 뛰어넘는 모험’이 아니라 ‘시간을 구성하고 이해하는 탐구’를 보여주었고, 이는 SF 장르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지적인 놀이’로 진화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또한 SF 영화의 주요 트렌드 중 하나인 ‘몰입형 세계관’도 테넷에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구현된다. 배경은 현실과 다르지 않지만, 그 안에서 시간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에 세계 자체가 낯설어지고 복잡하게 느껴진다. 이는 ‘블레이드 러너’나 ‘인셉션’처럼 SF적인 배경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룰을 바꾸는 방식으로 현실을 이질적으로 만드는 매우 독특한 연출법이다.
시공간 개념의 재해석과 관객 체험
테넷이 기존 시간여행 영화들과 다른 점은, 단순히 인물의 이동이 아닌 시간의 구조 자체를 뒤틀고 있다는 데 있다. 영화 속 ‘턴스타일’은 시간의 방향을 바꾸는 장치로서, ‘공간을 넘는 문’이 아닌 ‘시간을 반대로 흐르게 하는 입구’다. 이로 인해 인물들은 ‘같은 공간을 다른 시간 흐름으로 체험’하게 되며, 영화는 이를 통해 다층적인 현실을 구현한다. 예를 들어, 전반부에서 주인공이 목격한 사건이 후반부에 자신이 시간 역행을 하며 일으킨 일로 밝혀진다. 이는 이야기 전개의 복잡성을 증가시키지만 동시에 관객에게 퍼즐을 푸는 즐거움을 준다. 테넷은 관객이 단순히 ‘보는 자’가 아니라, ‘이해하려 노력하는 자’가 되기를 강요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한 번의 관람으로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우며, 반복 시청을 유도하는 특성을 지닌다. 또한 시간과 공간을 결합해내는 방식은 영화적 언어의 확장을 보여준다. 보통 영화는 시간과 공간을 분리해서 편집하지만, 테넷은 한 장면 내에서 두 가지 시간 흐름을 동시에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가 ‘공항 격납고 씬’이다. 같은 장소에서 정방향 인물과 역방향 인물이 동시에 움직이면서 시청자는 시공간의 왜곡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트릭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가 ‘시간을 다루는 예술’임을 극대화한 연출이다. 더 나아가 테넷은 ‘원인과 결과’라는 고전적인 이야기 구조조차 무너뜨린다. 어떤 사건이 먼저 일어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며 서로를 구성한다’는 순환적 구조는 동양 철학의 시간 개념과도 닮아 있다. 이는 서구적 직선 시간관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새로운 사고방식을 요구하며, 영화를 넘어서 시간에 대한 인식 자체를 확장시킨다.
『테넷』은 단순한 시간여행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구성하는 방식, 시간 속에서의 인간 행동,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철저히 해체하고 재구성한 복합적 작품이다. 기존 시간여행 영화들이 '감정'과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면, 테넷은 '개념'과 '구조'에 중점을 둔다. 과학 이론을 서사의 중심에 두고, 시공간을 영화적 언어로 풀어낸 이 작품은 2024년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되고 있다. SF의 진화는 곧 ‘이해의 깊이’이며, 테넷은 그 최전선에 서 있는 작품이다. 과학과 영화, 구조와 서사를 모두 경험하고 싶다면, 지금 다시 한 번 『테넷』을 감상해보자. 한 번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