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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개봉한 영화 ‘로건(Logan)’은 기존 마블 히어로 영화와는 전혀 다른 방향을 택한 작품이다. 슈퍼히어로의 화려한 액션과 대중성을 벗어나, 인간적인 고뇌와 감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이 영화는 ‘울버린’이라는 캐릭터의 마지막을 그리면서도, 미국식 정통 드라마와 웨스턴 영화의 정서를 깊이 반영하고 있다. ‘로건’은 단순한 히어로물의 틀을 넘어선 서사로 많은 관객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으며, ‘진정한 히어로의 마지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수작이다. 이번 글에서는 ‘로건’이 어떻게 웨스턴 장르의 미학을 계승하고, 감성적인 연출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집중적으로 분석해본다.
웨스턴 장르의 정서와 ‘로건’의 교차점
‘로건’이 기존 히어로 영화들과 가장 뚜렷하게 차별화되는 점은 바로 웨스턴 장르의 색채가 짙게 깔려 있다는 점이다. 웨스턴은 미국 영화사에서 오래된 전통을 가진 장르로, 광활한 대지, 고독한 영웅, 정의와 희생, 그리고 종종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드러낸다. ‘로건’은 이러한 웨스턴의 정서를 철저히 반영하며, 슈퍼히어로라는 틀 안에 전통적 미국 서부극의 미학을 녹여낸다. 영화 속 배경은 가까운 미래지만, 황량하고 거칠며 고립된 분위기는 고전 웨스턴 영화의 무대와 다를 바 없다. 특히 로건이 어린 소녀 로라와 함께 국경을 넘어 새로운 희망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마치 '셰인(SHANE)'과 같은 고전 웨스턴 영화의 구조를 그대로 닮았다. 영화 속에서 실제로 ‘셰인’의 장면이 등장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 장면은 로건과 로라의 관계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강화시키며, 영화 전체에 은유적인 무게감을 부여한다. 로건은 더 이상 강철 같은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그는 상처받고 늙었으며, 스스로의 힘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전통적인 웨스턴 영웅이 겪는 쇠퇴와 비극의 상징성과 맞닿아 있다. 그는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혹은 소중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길을 택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숙명처럼 다가오는 죽음과 화해하는 여정이다.
감성 연출의 힘: 말없이 울리는 장면들
‘로건’은 감정의 절제를 통해 깊은 울림을 주는 연출 방식으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전작들처럼 화려한 특수효과나 전투신이 중심이 아니라, 캐릭터들의 감정선과 관계 변화가 중심축이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액션의 리듬보다 정서적 무게를 우선시하며, 장면마다 ‘침묵’의 힘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찰스 자비에와의 마지막 대화다. 로건은 치매에 걸린 찰스를 보호하고 돌보는 역할을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찰스는 끊임없이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때로는 로건을 아들처럼 여긴다. 이들의 대화는 짧지만, 그 안에는 오랜 세월의 동지애, 후회, 그리고 아픔이 담겨 있다. 특히 찰스가 숨을 거두는 장면은 눈물 없이 보기 힘든 명장면으로 꼽히며, 로건의 눈빛과 숨죽인 반응만으로도 감정의 무게를 완벽히 전달한다. 로라와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감성 연출은 빛을 발한다. 로라는 말이 없고, 처음에는 로건과 감정적 거리감을 유지한다. 그러나 점차 둘 사이에 유사 부녀 관계가 형성되면서, 대사보다는 행동과 시선, 함께 하는 시간들이 관계를 설명해준다. 클라이맥스에서 로건이 목숨을 잃으며 로라에게 “그게 가족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감정적 정점을 이루며,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보기 드문 진정성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로건의 상처 난 몸을 자주 클로즈업하며, 그가 이제는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인간임을 강조한다. 이는 관객에게 ‘불사의 영웅’이 아닌, 피 흘리고 늙고 쓰러지는 한 인간으로서의 로건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러한 연출은 슈퍼히어로 장르를 ‘감성 드라마’로 탈바꿈시킨 핵심 장치라 할 수 있다.
미국식 영웅의 마지막, 그리고 그 의미
미국 대중문화 속에서 ‘영웅의 죽음’은 항상 중요한 주제였다. 그 영웅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보다, 어떻게 퇴장하는가가 더욱 깊은 인상을 남긴다. ‘로건’은 이 점에서 미국식 영웅의 ‘정통 엔딩’을 보여준다. 영웅은 고독하고, 세상과 불화하며, 마지막엔 사랑하는 이를 위해 희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는 늘 관객의 마음을 움직여왔다. 로건은 엑스맨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많은 등장과 활약을 보여준 캐릭터다. 그는 폭력적이지만 따뜻했고, 고통 속에서도 정의를 잃지 않았다. ‘로건’에서는 그 모든 과거를 짊어진 채, 새로운 세대를 위해 자신을 던진다. 이는 단순히 한 캐릭터의 마지막이 아니라, 마블이 구축해 온 히어로 서사의 한 장을 정리하는 의미도 있다. 특히 로건의 죽음 장면은 히어로의 죽음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그는 조용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죽어간다. 거창한 희생도, 세상을 뒤바꾸는 영웅담도 아니다. 다만,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로라와 아이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이다. 그는 누군가의 아버지로, 보호자로, 인간으로 죽는다. 영화는 그 죽음을 숭고하게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진정한 영웅의 마지막으로 기억된다. 이는 슈퍼히어로 장르의 새로운 가능성이자, 웨스턴 장르와 감성 드라마의 결합이 만들어낸 서사적 결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이 ‘로건’이 영원히 기억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로건’은 단순한 슈퍼히어로 영화의 마지막 편이 아니다. 그것은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적 감정과 관계를 통해 진짜 ‘영웅의 마지막’을 보여준 작품이다. 미국식 웨스턴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액션보다 감정에 집중한 연출은 많은 이들에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명장면들을 선사했다. 휴 잭맨의 마지막 울버린 연기는 단지 시리즈의 끝을 장식한 것이 아니라, 한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고 마침표를 찍은 연기의 절정이었다. ‘로건’은 영웅의 죽음을 통해 삶과 관계, 희생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영화로, 지금 이 시대에도 충분히 다시 볼 만한 의미 있는 작품이다.